함양의 전설 - 황석산성 피바위 ‘옥녀부인의 장렬한 죽음’

함양군민신문 | 입력 : 2016/06/22 [01:21]
▲ 정상에서 바라본 황석산성     © 함양군민신문

 

 

1592년의 임진왜란이 5년간이나 계속되는 동안 이 나라의 참상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화친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서로의 명분을 주장하다가 회담이 결렬되고 왜적은 1597(선조30)정유년에 재차 침략을 단행했다.

 

 

남해안으로 상륙한 왜적은 곽재우 장군의 요새인 창녕 화왕산성을 돌아 초계와 합천을 거쳐 진격했다.

 

 

전주와 남원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올라오면서 황석산성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체찰사로 있던 이원익은 안의, 거창, 함양 등 3개 읍의 백성들과 군사를 모아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그 당시 안음 현감으로 있던 곽준은 직접 관민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하고 병기와 기재를 정비하여 싸움에 대비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가족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와 곽준과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고 북상하는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때 김해부사 백사림이 도별장으로 가담하여 황석산성을 사수하기로 하고 합세하여 왔다.

 

 

왜적은 호남 진출의 장애물인 황석산성을 깨뜨리는데 전력을 기울인다는 작전을 세우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마사시게 등의 장수들이 선봉장으로 직접 공격일선에 나섰다.

 

 

이들은 황석산성 일대를 겹겹이 둘러싸고 진지를 구축한 뒤 818(음력) 밝은 달빛 아래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아군의 진지 역시 튼튼하게 방비되어 있었다.

 

 

관군과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뜻을 같이하고자 모여든 남녀노소의 백성들은 모두가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

 

 

사기는 충천하여 일당백의 용맹을 지니고 있었다.

 

 

무기 없는 백성들의 손에는 낫과 죽창이 들려졌고 부녀자들은 돌을 운반하여 석전으로 대항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

 

 

왜적들의 거센 공격에 맞서 침략자들과 싸우는 우리의 호국 정신과 군관민이 단합된 우국충정(憂國衷情)이야말로 저들에게 쉽게 성문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사력을 다하여 활을 쏘아 적을 거꾸러뜨리고 돌과 바위를 굴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놈들을 저지시켰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우리군의 항전은 왜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적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왜적들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인 퇴각으로 작전상 후퇴이긴 했으나 이로 인해 왜적은 더욱 초조해져 갔다.

 

 

조그마한 산성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해 시일만 끌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수치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산성 주변에 형형색색의 깃발을 세워놓고 이곳저곳에서 함성을 지르게 하여 수많은 군사가 응원해 오는 것처럼 꾸몄다.

 

 

군사의 수효가 많은 것처럼 알리기 위해 전 병사들로 하여금 성을 빙빙 돌게 하면서 성을 비우고 퇴각하면 추격하지 않겠다는 등 온갖 회유와 위협을 가해 왔다.

 

 

그러나 성과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백성들은 누구하나 귀담아 듣지 않고 같이 싸울 것을 다짐했다.

 

 

시일이 흘러가자 왜적들은 더욱 마음이 초조하여 회유와 위협을 가해왔으나 성내에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초조한 가운데 지친 왜적은 마침내 전 병력을 투입시켜 일시에 치열한 공격으로 노도처럼 밀어붙였다.

 

이에 겁을 먹은 김해부사 백사림은 도별장이라는 장수의 직분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나라의 녹을 먹고 국가와 민족을 지켜야 할 무장의 사명을 저버리고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몰래 가족들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달아나고 말았다.

 

 

열린 북문을 통해 왜적들은 물밀 듯이 쳐들어옴으로써 성안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성안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백병전이 벌어졌고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새벽달이 질 무렵 차디찬 새벽공기를 가르는 칼날 부딪치는 소리, 바위가 무너지는 소리, 도끼와 몽둥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하늘을 울렸다.

 

 

비명소리와 함께 군사들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우리는 후손으로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민족의 내부에 조국을 배반하는 변절자가 없는 한 우리 민족의 멸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사림의 비열한 행동이 없었던들 왜적은 산성 공격을 포기했을 것이다.

 

 

황석산성을 피로 물들인 한 맺힌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성내에서 장정들의 식사를 맡아 일하던 많은 부녀자들 중에는 옥녀라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원해서 성내에 들어와서 왜군과 싸워 원수를 갚기로 맹서한 부인이었다.

 

현내면(지금의 안의면 소재지)에서 남부럽지 않게 부모 슬하에서 자라왔고 부모님의 정혼으로 이웃 마을로 출가하게 되었다.

 

 

달콤한 신혼생활의 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왜란이 일어났다.

 

 

그의 남편은 국난의 위기를 구출하고자 의병으로 지원하여 출전하였다.

 

왜적과의 싸움에서 그의 남편은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녀부인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다.

 

러나 슬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들을 잃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들 대신에 극진히 봉양해야 했던 것이었다.

 

왜적이 정유년에 재침하자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진하여 성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성안에서 살육전이 벌어지자 관민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고 젊은 옥녀부인도 죽기 전에 남편의 원수인 왜병을 하나라도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성내는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러한 병화 속에서 다가오는 왜병을 향해 손에 든 부엌칼로 가슴 한 복판을 있는 힘을 다해 찔렀다.

 

 

여자라고 방심했던 왜병은 허를 찔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부녀자들도 돌을 던지고 낫으로 혹은 칼로 몽둥이나 죽창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들고 적에게 맞섰다.

 

 

실로 우리민족의 기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옥녀부인은 남편의 원수를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나라도 더 많은 왜병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왜병 한 놈이 쓰러지자 이 모습을 본 다른 놈이 칼을 빼어들고 이리로 달려왔다.

 

 

잔인한 왜적들은 부녀자라고 그냥 둘리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적에게 잔인한 죽음을 당하거나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 치욕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옥녀부인은 적에게 수치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왜병이 가까이 오기 전에 서편 성벽으로 달려가서 벼랑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선혈로 벼랑을 붉게 물들이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부녀자들도

 

 

우리가 살아남아 어찌 왜적들의 모욕을 받으리

 

 

하고 뒤따라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뛰어내렸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많은 부녀자들의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4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벼랑 아래의 핏자국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울적하게 해 준다.

 

이렇게 처절하게 피로 물든 바위를 후세 사람들은 피바위 라고 이른다

 

 

▲ 황석산성 피바위     © 함양군민신문

 


▲ 황석산성 순국사적비     © 함양군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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