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전설 - 이은대(吏隱臺)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온 곳’

함양군민신문 | 입력 : 2016/07/06 [05:06]
▲ 상림 역사인물 공원의 점필재 김종직 선생 흉상     © 함양군민신문

 

 이은대는 함양읍을 흐르고 있는 뇌계(위천수)의 남쪽, 지금의 함양제일교와 제이교의 중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방송국 앞에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함양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솟아있는 곳이 이은대요, 그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이은리라고 한다. 

 

 이은대란 글자 그대로 관리가 숨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조 성리학의 대가이며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곳 이은대에 얽힌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와 있을 당시 유자광과의 사이에 생긴 이야기다.

 

 유자광이 종의 몸에서 천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조에게 특채되어 당시의 훈구파에 정치적 뿌리를 박고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이 바뀔 때마다 줄타기를 잘 해서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그의 고모가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천대와 설움 속에서 살아온 서자이기에 입신양명하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어 고모에게 인사차 함양을 들렀던 것이다. 

 

 함양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고을 원님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김종직은 그렇지 않아도 유자광이를 기피해야 하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함양에 온다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라는 직위는 군수보다 높은 자리다.

 

함양에 오게되면 관찰사에게 깎듯이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야 되었다. 

 

 김종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 보나 유자광에게 굽신 거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자 출신의 쌍놈 주제에 뭣하러 이곳에 온담. 내 어찌 그에게 고개를 숙이리.’ 

 

 하고 중얼거리며 아전에게 명하였다. 

 

 “관찰사가 이곳에 오거든 군수는 지방 순행 차 출장하고 없다고 여쭈어라.” 

 

 “어디로 가시렵니까? 사또.” 

 

 “등구 마천을 거쳐 수구실로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일러라.” 

 

 김종직은 유자광을 만나게 되면 난처하였다.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명을 받들고 공무로 오는 것도 아니고 제 사사로운 일로 오는데 구태여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관아를 비우고 이곳 이은대에 와서 숨어버렸다고 한다. 

 

 관찰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피한 것이다. 

 

 유자광이 함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이 산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이다. 

 

 마음 놓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서정적인 고장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한 수의 시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에 올랐다.

 

그리고 아전에게 필묵을 준비해 주도록 하였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있느냐.” 

 

 잠시 후 유자광이 시 한수를 읊었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사사로운 볼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목적지인 고모댁으로 떠났다. 

 

 유자광이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김종직은 관아로 돌아왔다. 

 

 그 후 학사루에 올라보니 새로운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상히 생각한 김종직은 아전에게 물었다. 

 

 “여봐라, 저기 새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관찰사 유자광 사또께서 걸어놓고 가셨습니다.” 

 

 “무슨 현판인데.” 

 

 “네. 시를 한수 읊어 현판으로 걸어놓은 것인 줄로 아옵니다.”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내려라.”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내려서 어찌하리까?” 

 

 “아궁이에 넣어버려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해 버렸다. 

 

 말은 날개가 돋히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날아가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이야기가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으리, 나으리의 시가 함양의 학사루에 걸릴 자격이 없다하여 김종직이가 그 현판을 철거했다 하옵니다.” 

 

 유자광은 그 말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출신이 떳떳하지 않아 열등감에 쌓여 있는 유자광이고 보면 그럴 수 있다.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흔히 말하기를 이 현판 철거사건이 후에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데 김종직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 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가졌다.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 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확실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이에 유자광은 벌떡 일어나며 

 

 '난 글을 모르는 무관 아닌가? 자네 같은 선비가 짓는 시를 내가 어이 짓겠나. 어허 고인한 손이로고...' 

 하면서 총총히 사라졌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기를 쓰고 빌미를 찾아 무오사화를 발생시켜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 것이다. 

 

 이은대는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 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종직은 그 뒤 이곳에 작은 당을 짓고 이은당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바쁜 공무 중에도 여가를 이용하여 자주 들러서 시부를 읊었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김종직의 사후에는 군민들이 그를 추모하여 이은대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 사당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일제 강점기 에는 왜놈들의 신사를 지어 신사참배 강요의 장소가 되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파괴해 버렸다. 

 

 6.25 사변 이후는 이곳에다 충혼탑을 세우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위천수변 이은대.(지금은 충혼탑이 있다)     © 함양군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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