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 사진작가 그옛날 ‘마천 풍경’ 카메라에 담다

구본갑 논설위원 | 입력 : 2018/03/26 [15:49]

 

▲ 사진가 조성기씨는 1994년 여름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우연히 우체국 잡지에서 정년퇴직을 앞둔 지리산 산골마을 최동호 집배원을 알게 되어 그의 삶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고초려 끝에 허락을 받아 열흘 동안 동거동락하며 어렵게 담아낸 사진이다.     © 함양군민신문

 

편지로 모든 소식을 전해주던 시절이 그립다. 그 당시의 우편배달부는 사랑을 전하는 전도사로서 동네의 심부름꾼 역할도 톡톡히 했다. 동네 앞 느티나무 아래 모여 무더위를 식히는 마을주민들에게 우편물을 전해주고, 눈이 있어도 읽을 수없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읽어주다 같이 울고 웃었다. 오랜 세월 한 마을을 드나들다 보니,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헤아리는 우체부는 그들이 메고 다니는 큰 가방만큼이나 품도 넓고 속도 깊었다

 

 불룩한 가방을 둘러메고 동네에 들어서는 우체부는 늘 가슴 설레는 손님이었다. 자신의 키만한 낡은 갈색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산길 들길을 걸어다니던 우체부는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빨간색 자전거를 타고 왔다. -정영신 여행작가.

 

◆흑백 필름 칸칸마다 오버랩

 최근 조성기 사진작가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을 소재로 한 사진집을 출간했다. 도서출판 ‘눈빛’ 발행. 제목은 『우편집배원 최씨』. 이 사진집은 조성기 작가가 대학 시절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우편집배원 최동호 씨를 주인공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쟁이 근성과 42년 동안 묵묵히 일해 온 집배원의 모습이 흑백 필름 칸칸마다 오버랩된다.

 

▲ ‘우편집배원 최씨’ 사진집 표지. 조성기 지음     © 함양군민신문


 조성기 사진집 『우편집배원 최씨』 서문에 이런 글이 적혀져 있다.

 

“1994년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 우연히 우체국 잡지 기사에서 정년퇴직을 앞둔 지리산 산골마을의 집배원을 알게 되었다. 문득, 나는 집배원의 일상을 촬영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무작정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서 그의 근무지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함양군 마천우체국까지 찾아갔다. 당시 나는 학생 신분으로, 그는 자신을 며칠이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게 해 달라는 나의 요청을 첫 만남에 거절하였다. 나는 며칠 뒤 우체국의 허락을 얻으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어 발걸음을 우체국으로 돌렸다. 사정을 말하니 우체국장님은 선뜻 집배원용 오토바이까지 협조해 주셨다. 그 후 그에게 촬영을 허락해 달라 재차 간곡하게 말했고, 그는 나의 부탁을 끝내 들어주었다. 그는 집 대문 옆에 작은 방을 내주었고, 함께 집밥까지 먹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당시 나의 열정을 가상히 여겼던 것 같다.” (3쪽/머리말)

 

◆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조성기 사진집 『우편집배원 최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감상하며 1990년초반 함양군 마천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 조성기씨의 사진에는 어린이가 대신 편지를 받아 집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부터 담장 위로 편지를 건네주는 모습, 나들이 길에서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 하나 하나가 잊혀져가는 추억 보따리를 풀어헤친 듯 정겹다.     © 함양군민신문

 

 다른 통신수단이 없는 시골에서 우체부는 마을과 바깥 세상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이른 아침 집앞 감나무에서 까치가 짖어대면 어른들은 자꾸만 동구밖을 바라보며 우체부를 기다렸다. 밭에서 김을 매다가 언덕 넘어 우체부 아저씨가 보이면 호미를 거두고 다가갔다. “아드님 편지가 늦어지네요”라고 우체부가 말을 던지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라고 딴전을 피우면서 서운함을 감췄다. 김석종 작가(언론인)가 우체부의 애환을 말한다.

 

 사람들은 우체부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체부 양반, 이리 와서 목좀 축이고 가”. 들에서는 흙 묻은 손으로 농주를 권하고, 새참 때는 꽁보리밥이라도 나눠 먹었다. 할머니는 감주를 담갔다고 소매를 붙잡았다.

 

 길이 험해서 자전거를 타기보다 끌고다니는 일이 더 많았다. 동네에 들어서서도 자전거를 받쳐두고 편지 주인을 찾아다녔다. 큰 행낭을 멘 우체부가 “편지요”를 외치며 울안으로 들어서면 주인은 맨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곤 했다. 동네를 도는 동안 개도 꼬리를 치며 따라다녔다.

 

▲ ‘우편집배원 최씨’ 사진집 해설을 쓴 다큐사진가 조문호는 “그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심산골의 소박한 정취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그의 삶을 통해 산골마을 사람들의 삶을 골고루 조명하고 있었다. 비록 지리산 산골의 한정된 기록이긴 하지만, 이는 한 개인과 지역을 통해 인간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인 것이다. 객관적 서술 형식의 르포르타주여서 현장의 생생함과 박진감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평했다.     © 함양군민신문

 

 매일 너댓개 산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오지의 우체부들은 편지를 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서 호적초본을 떼어다주고, 농약 농기계 부품 등 심부름을 해주곤 했다. 실연당한 전씨네 딸이 식구들이 들에 나간 사이 농약을 먹고 신음 중인 것을 발견해 목숨을 살린 것도 우체부였다. 우체부는 좁은 바닥을 몇년씩 돌아다니기 때문에 집집 속사정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었다. 서울로 유학간 최씨네 아들이 눈물겨운 편지를 통해 하숙비를 독촉하는 것도, 공장에 다니는 효심 지극한 박씨 막내딸이 송아지 살 돈을 부쳐온 것도, 시집 간 이씨네 외동딸이 첫딸을 낳았다는 것도, 송씨 큰아들이 이웃동네 김씨 셋째딸과 연애하는 것도 우체부는 훤히 알고 있었다.

 

 까막눈 어른들에게는 이등병의 군사우편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읽어주고,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편지를 받아 써 부쳐주기도 했다. 아들의 징집 영장을 전달하고, 그 아들이 논산훈련소에서 보내온 옷꾸러미 소포를 전해주는 것도 우체부의 몫이었다. 도장을 받아 장부에 찍으며 “요즘은 군대생활이 아주 편해졌다”는 말로 아들 걱정에 눈물 글썽이는 어머니를 달랬다.

 

 시골에는 우체부가 며칠에 한번씩 다녀갔다. 이장집에는 한꺼번에 1주일치 신문과 새농민 잡지가 배달됐다. 시골 우체부는 겉봉에 번지를 적지 않아도 이름만 있으면 잘도 주인을 찾아 편지를 전했다.

 

◆좋은 소식만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우체부가 좋은 소식만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먼데 사는 작은 아버지의 부고도 있고, 월남에 간 아들의 전사통지서도 있었다. 합격통지서를 기다리는 재수생은 우체부가 그냥 지나쳐가면 눈앞이 캄캄했다. 집배가방 속에는 세금고지서, 농기계대금 독촉장, 법원의 가압류 통보서 등도 담겨 있었다. 우체부들은 편지봉투의 글씨만 봐도 그것이 기쁜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아맞히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의 편지는 감정이 오고가는 은밀한 비밀통로였다. 처녀 총각들은 그리운 연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지를 구겨가며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온갖 감정을 동원해 써내려간 사연은 아침이 되면 왜 그리 유치해 보였던지. 군대 간 애인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가씨들은 우체부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 그의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사진가와 우체부의 마음이 일치된 휴머니즘에 의한 감성이다.-정영신.     © 함양군민신문

 

 우체부가 커다란 가방을 열고 조금은 구깃해진 하얀 편지봉투를 꺼내들 때는 감격스러워 온몸이 떨렸다. 답장에는 잘 말린 네잎클로버나 은행잎 따위를 끼워넣기도 했다. 누나는 봉투 모서리에 “우체부 아저씨 고맙습니다”라고 조그맣게 적어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때는 젊은이들 간에 펜팔이 유행했다. 낯 모르는 상대에게 감정을 부풀려가며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우체부 아저씨가 답장 가져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펜팔시대의 낭만이었다. 국제 펜팔을 통해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중·고생들도 많았다.

 

 라디오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도 사연이 넘쳐났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심야 음악프로의 DJ들은 전국에서 보내온 매력적인 사연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방송국에서는 이런 엽서들로 전시회를 열고 책도 펴냈다. 학교에서는 국군의날이나 연말을 앞두고 군인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도록 했다.

 

▲ 우편집배원은 편지로 사람하고 사람 사이를 잇습니다. 우편집배원을 사진으로 담은 한 사람은 사진으로 사람하고 사람 사이를 잇습니다. 아스라한 지난날하고 오늘날을 잇고, 그리 멀지 않은 듯하지만 어느새 꽤 멀리 떨어진 지난날하고도 오늘날을 가만히 잇습니다. 먼 길을 글월 하나가 잇고, 먼 나날을 사진 하나가 이어요. 숲노래 (hbooklove)     © 함양군민신문

 

 사람좋게 생긴 우체부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달해 온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 군대 간 애인의 편지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가씨들. 이런 모습들은 이제 지난 시절의 추억이 돼버렸다. 사랑과 낭만의 전령사 같은 우체부의 이미지도 많이 퇴색했다. 요즘은 세금이나 신용카드대금 고지서, 청첩장과 광고물이 우편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물지 않은 생각들을 ‘광속’으로 쏘아대는 e메일 시대. 직접 편지지를 고르고, 예쁜 글씨로 사연을 담고, 곱게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집어넣는 정성과 서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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