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0월, 적대적인 양측(UN군 對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만나 정전회담을 가졌다. 회담주제는 ‘정전 후 군사경계선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였다.
회담 전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 강원도 양구~인제 ‘단장(斷腸)의 능선’에서는 참혹한 전투가 치러지고 있었다. 추산에 따르면 미군과 프랑스군 병사 약 3700명과 북한군과 중공군 병사 2만5천명이 전사했다.
이때, 지리산에서는….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의 기록에 따르면, “눈 덮인 지리산 골짜기 마다 (국방군이) 박격포탄을 작렬하게 퍼부어댔습니다. 박격탄 터지는 소리는 겹겹인 지리산 봉우리 봉우리들을 울려대며 겹메아리를 만들어냈고, 계곡물이 무수한 물방울들을 튕기며 솟구쳐 올랐답니다. 산속에 숨어 있던 빨치산은요, 그들의 몸뚱아리는 터지고 갈라지고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배가 터져 내장이 다 흘러나온 사람, 얼굴 반쪽이 날아가버린 사람,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사람, 팔다리가 없어져 버린 사람, 박격포탄을 맞은 사람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곧 (빨치산들의) 숨들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다리들은 눈(雪)을 핏물로 적시며 한참씩 푸들거리는 경련을 일으켰다.
◆극우세력들에겐 대단히 불순한 책
○…최근 독일역사학자 베른트 슈퇴버(포츠담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쓴 『한국전쟁』이 상재됐다. 원제는 Geschichte des Koreakriegs. 우리나라 극우세력들에겐 대단히 불순한 책이다.
이 책 147쪽에 함양·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관련,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퇴하는 북한군과는 별도로 남한에서는 격렬한 빨치산 전쟁이 전개되었다. 1951년 2월, 산청·거창·함양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에서 1500여명의 사상자 중 최대 4분의 3에 달했던 여성, 아이, 노인들이 총으로 살해된 것은 빨치산 소탕이라기보다는 적을 편드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민간들을 위협하기 위한 직접적인 국가테러에 가까웠다…. 1951년 2월 (거창군) 현장에 출동한 남한군 병사들은 가족 중에 경찰관이나 공무원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닥치는대로 총을 쏘아 죽였다”
○…소설가 이병주. 빨치산들의 산속투쟁을 그린 대하소설 『지리산』을 썼다. 어느 문학평론가가 이병주 씨에게 물었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들의 투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답했다. “미친갱이 지랄병을 틀었지 뭐.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려했던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외제를 무찌르고 일제잔당을 제거하고 그래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기 위해 투쟁을 한 거요, 순결함은 있었소, 빨치산 투쟁을 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혔던 적도 없어, 인민들에게 끝없는 신뢰를 얻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친 혁명을 전사들이었소만, 허망,허망! 남쪽에서, 북조선에서 이들의 투쟁을 100프로 무시한 까닭에 역사 속에서 버림받고만 존재들이었소이다. 그런 병신머저리들이 세상에 어디 있나?”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대미(大尾)는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출신 남도부(南道釜) 하준수 가족 이야기로 처리된다.
○…빨치산은 누구이며 한국동란 전후, 남한(한국)땅에서 무슨 일을 했나? 빨치산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6·25 전쟁을 거쳐 19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것이 이념 분쟁 과정을 통하여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 빨갱이다. 흔히 조선 인민 유격대라고 부르며, 남부군이나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남한 빨치산들은 민족해방을 주장하며 후방에서 북한군을 도왔다.
빨치산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순창군 쌍치면, 복흥면, 구림면은 해발 200m 이상의 산악 지대로서 6·25 전쟁 시기 회문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위치하면서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과 경찰은 토벌대를 창설하였다. 1948년 10월 30일 호남 방면 전투 사령부 북지구 전투 사령부 · 남지구 전투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1949년 3월 1일 호남 지구 전투 사령부, 1949년 9월 22일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 1950년 10월 15일 제3 군단 예하 제11 사단이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0년 12월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1951년 11월 16일 백야 전투 사령부, 1953년 5월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등도 빨치산 토벌을 단행하였다. 1951년 2월에 회문산에는 약 1,350명의 빨치산이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화랑 사단이라 불리던 11사단의 20연대 제1 대대와 제2 대대가 회문산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1955년 7월 1일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가 ‘해산 선언’을 낭독하면서 빨치산 토벌대가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지리산·덕유산·회문산 등에는 한두 명의 소규모 빨치산이 잔존하고 있었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은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체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남한에서의 빨치산들은 괴멸되었다.
◆임창호 군수, 위령제 초헌관이 되다
○…지난 8월 30일 오전,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함양군 양민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함양군 양민 희생자 제67주기 제8회 위령제 및 추모제가 수동면 도북리 양민학살 희생자 합동묘지에서 열렸다. 차용현 유족회장, 임창호 군수, 임재구 군의장 등 유족 100여 명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봉행됐다. 이날 위령제는 유족회장의 개제선언, 임창호 군수를 초헌관, 임재구 의장을 아헌관, 유족회장을 종헌관으로 181위에 대한 제례의식을 열고 희생된 넋을 위로했다. 이어진 추모에서 차용현 유족회장은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이 67년이 되도록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며 “하루빨리 원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함양군이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함양양민학살사건은 1948년부터 1950년 지리산 인근에서 활동 중이었던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9개 읍면에서 민간인 80여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를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총 300여명 넘는 인원이 희생된 민족사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은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명예를 회복했으며 올해로 8번째 합동위령제와 추모제를 개최하게 됐다.
◆벽송사 원돈 스님
○…지난 8월 29일 함양군 마천면 벽송사 원돈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우리 절에서 거창군에 사는 이이화 선생께서 주관하는 인문학 교실(파랗게날)을 여는데 시간 남으면 싸게싸게 오소잉, 응, 주제가 뭐냐 하면 다시 만남, 빨치산과 토벌대란케. 한국동란 당시 적대관계였던 이 분들이 우리 절에서…해후를 한다 이 말씀이오. 이 분들 연세 이제 80이 넘어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꼭 오셔서 이 영감님들 얼굴 사진도 찍어놓고 증언도 들어놓으시란케”
다음날, 함양읍~유림~추성 행 버스를 타고 벽송사를 향했다. 차창 밖을 내려다보니 유림 논 위에 잠자리 떼들이 가득하다. 비가 오시려나?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과 흰 구름이 서로 번갈아 먼 산과 들녘을 넘나든다.
오후 2시 벽송사에 도착, 한줄기 단향(單香) 곱게 피어오르는 법당에 가, 부처님 전에 절을 올렸다. 법당 뒤편으로 푸르게 솟구쳐 자란 소나무가 보인다.
원돈스님이 산신각 쪽에서 내려오며, “오메, 오셨네. 녹음기도 들고 왔겠지? 어디보자 팸플릿이 어디있냐, 저기있네, 구선생 팸플릿 한번 읽어보소, 사연 많은 노인들(빨치산과 토벌대원) 프로필이 적혀져 있으이”
임방규|고창중학 시절 학생운동을 시작하여 인민군의용군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가, 회문산에 들어가 남부군 소속 빨치산으로 활동. 양심의 자유를 고수하여 전향을 거부하여 33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비전향장기수모임인 통일광장 대표.
최정범|1928년 남원시 이백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남. 625전쟁이 터지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민군 남원군당 적전부장, 1사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며 빨치산대장으로 불렸다. 저서로는 『지리산 달궁 비트』(강동원 엮음).
문창권|제11사단 산하 향토방위특공대 대원으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참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종전 후 참전군인용사회 마천지회 회원으로 지역봉사 활동에 나섰다.
임명근|지리산 토벌대 작전참모 및 대한청년단총무로 빨치산 토벌에 참여, 종전후 함양향교 전교, 함양시조협회장 등을 지낸 한학자로서, 참전군인용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향토방위특공대 대원을 유공자로 정하는데 공헌, 마천 향토수호전적비 비문을 썼다.
김기태|함양중학 재학 시 향토방위특공대 대원으로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형이 전사하자 입대, 육군본부 부관실 사병계로 복무, 종전 후 참전군인용사회 마천지회장으로 봉사했다.
오후 2시10분, 벽송사에서 ‘다시 만남 : 빨치산과 토벌대’라는 주제 하에 인문학교실이 열렸다.
두 분의 빨치산과 세 분의 토벌대원이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서의 전투를 회고한다.
임명근 전 토벌대원이 말한다. “한민족 8·15해방의 기쁨도 잠시, 외국강대국들 때문에 삼천리 금수광산에 삼팔선을 그어놓고 이념과 사상, 그것이 뭣이라꼬, 좌우로 분열, 어제의 형제가 오늘 원수가 되어 적으로 변해 싸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민족상쟁의 참상이 두 번 다시 없기를…바라는 바 올씨다”
지리산 빨치산 대장 최정범 옹이 말한다. “우리(빨치산)는 사회주의를 흠모했소.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나는 것이오. 사회주의는 실업, 가난을 떨구기 위해 태어난 것이외다. 이 땅에 평등!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했소”
그러나 빨치산들은 평등의 쑥부쟁이를 피우지 못하고 괴멸됐다. 지리산 투쟁에서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종전 후, 연좌제에 묶여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33년 옥살이를 한 임방규 옹이 말한다. “해방 후 반동세력과 미제가 결합. 나라를 망쳤다. 인민이 하나로 튼튼하게 결속했더라면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지금도 나라꼴이 네가 옳니, 내가 옳니 분파적인데, 하나로 뭉쳐야 한다. 단결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내부단결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느냐, 안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단결을 강화시켜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다!”
원돈 스님도 한 말씀했다. “벽송사에서 용매정진하셨던 서산대사께서 쓴 시가 생각납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을지라도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모름지기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나의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우리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잘못된 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왜 전쟁이 일어났느냐? 왜 무고한 양민들은 학살되어야 했는가? 빨치산은 왜 이 땅에 평등이라는 나무 한그루를 심어야 했을까? …성찰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스님의 입장에서 무고하게 죽은 양민들의 원혼은 반드시 풀어줘야 합니다 ”
스님의 말씀을 듣자니 빨치산 실록 『남부군』 후기를 쓴 이호철 소설가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60여 년 전에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저 수많은 남한유격대원(남부군)들과 그 지도자 리현상 같은 사람을 우리 역사의 제자리에 자리 잡히게 할 날은 언제일까? 물론 아직은 제대로 그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될 날은 온다. 조국 산하에 꽃으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을 떠메고 역사 앞에 우뚝 설 날이 올 것이다. (중략) 한국동란 전후(前後)…그 시절, 조국은 우리에게 있어 과연 무엇이었을까? 또 우리는 조국에게 있어 무엇이었을까?…”
○…벽송사 저 너머 지리산 칠선계곡 위로 뭉게구름만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진지원|이관일(전쟁기록가)